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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산 > 어업자원연구실]2017-09-02 12:10:16/ 조회수 1227
    • 청어 고갈로부터 배운 일본의 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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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어 고갈로부터 배운 일본의 어업

      출처 : 日経ビジネス 2017.8.29
      http://business.nikkeibp.co.jp/atcl/report/16/082400157/082400002/

      일본 어업의 역사 속에서 못 잡게 된 물고기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떠올리는 것은 청어이다. 청어잡이는 에도시대부터 전후까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중요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몸은 다시마 말이나 훈제로 알은 카즈노코(数の子, 청어알)로 널리 사랑 받아 왔다. 그러나 현재의 어획량은 과거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족분은 수입품으로 대체되었다.

      청어가 고갈된 배경에는,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조업의 형태와 자원의 회복력을 과신하고 규제를 마련하지 않고 조업을 계속한 바가 있다. 이것은 자원 감소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참다랑어 등과 일맥상통하는 문제가 있다.

      홋카이도 앞바다의 야기시리 섬. 자동차로 일주하면 20분 정도인 섬에서는 어업이 약 200명의 주민의 중요한 생활의 양식이 되고 있다. 어항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낡은 목조건축의 집이 남아 있다. 흑단과 노송 나무를 많이 쓰는 곳간도 갖춘 연면적 569제곱 미터의 넓은 만듦새. 건조 당시는 산뜻한 대저택이었을 것이다. 그 건물은 홋카이도의 부자 서열 10위 안에도 들어갔다. 小納家의 옛 저택이다. 小納家를 부유하게 만든 것은 근해에 내유하는 청어였다.

      문화재로 저택을 보유하는 羽幌町에 따르면 小納家는 메이지 17년경에 이시카와 현에서 야기시리에 이주했다. 처음에는 잡화점과 우체국을 운영하다 청어잡이의 권리를 양도받으면서 단번에 그 재산을 부풀렸다. 야기시리는 원래 양게시리로 불리는 아이누의 거주지였다. 에도 시대 중기에서 마쓰마에번(松前藩)의 상인이 아이누의 주민을 고용하고 청어잡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에조치(蝦夷地)로 정착이 해금되면서 어부가 급증했다.

      다랑어와 일맥상통하는 청어의 문제

      청어잡이는 메이지 20~30년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인구는 2000명을 넘어 섬 전체에서 2만 톤 이상의 청어가 잡혔다. 小納家의 청어 전각이 세워진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이후는 흉어로 소폭 회복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청어잡이는 쇠퇴하였다. 쇼와(昭和) 30년대에는 청어의 산란·방정에 의해서 바다가 하얗게 물들던 현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小納家도 이 시기에 청어잡이에서 철수하였고 쇼와(昭和) 50년대 羽幌町에 기증되기까지 청어 저택은 무인의 폐허로 변했다.

      야기시리의 다랑어 어부, 타카마츠 유키히코 씨는 홋카이도의 참치 어부 약 70명이 참여하는 "지속적인 참치잡이를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이다. 감소하는 참치 자원에 위기감을 느끼고 2014년 모임을 만들었다. 타카마츠 씨는 "일본 어업의 본질적인 문제는 청어잡이 때부터 변함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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